CEO 수필 2020_06_09
엔트로피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자연은 핑계를 대지 않는다. 예외 역시 허용하지 않는다. 주어진 법칙대로 움직일 뿐이다. 열을 가하지 않았는데 커피가 자발적으로 뜨거워질 수 없으며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엔트로피는 정돈된 질서의 상태를 정량화하는 용어이다. 달걀을 깨뜨리면 엔트로피가 높아진다. 달걀은 잘 정돈된 낮은 엔트로피 상태이고 깨어진 달걀은 무질서도가 증가해 엔트로피가 높아진 상태이다. 깨어진 달걀로 온전한 달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기적이다. 아직까지 자연에서는 그 어떤 경우도 무질서도가 저절로 낮아져 깨어진 달걀이 온전한 달걀로 가는 경우는 무한대의 시간을 가정하더라도 관찰 된 적이 없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는 것, 이것이 엔트로피적인 자연계의 관찰 결과이다.
30년동안 CPU에 몰입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CPU 자체에 매료된 이유도 있었지만 생명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근본적 의문들에 대한 답을 자연 과학적으로 접근 해 보고자 함이었다. 1982년 CPU 설계를 처음 시작 했을 때만 해도 10년을 공부해 원자 크기의 제조가 가능한 반도체의 극한 기술까지 파고 들어가 물질의 궁극을 밝혀내고 또 다른 10년은 최첨단 컴퓨팅 기술을 접목하여 최고의 시뮬레이션 기술을 통해 물질의 궁극에 기반을 둔 생명의 신비를 밝혀내 역사의 수레바퀴를 한치라도 전진 시키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당초 생각했던 20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인간의 최첨단 과학 기술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열역학 제 2 법칙을 통해서였다. 인류가 발견해 온 자연 과학 법칙들은 예외 없이 수정되어왔다. 초기에 수립한 가정의 오류에 따라 혹은 새로운 발견에 따라 수정되어왔다. 일상 생활 거의 대부분을 설명해 주는 뉴턴 역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수정되어왔고 원자 크기의 세계에서는 양자 역학으로 대체 되어 왔으며 아직도 일상 세계와 원자 세계를 통합해주는 양자 중력학은 수립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열역학 제 2 법칙만큼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직관적으로 설명해주며 양자 역학적 관점이든 상대성 이론적 관점이든 어떤 실험 결과에도 모순이 없어 일상 세계이든 원자 세계이든 이견이 없는 유일한 법칙이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이것이 열역학 제 2 법칙의 세계관이다. 어떤 경우에도 열은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르며 차가운 곳에서 뜨거운 곳으로 흐르는 경우는 없다. 이런 초자연적 현상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커피잔에 담겨진 커피가 저절로 뜨거워지는 경우가 없듯 열의 이동은 항상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만 향한다. 이것이 열역학 제 2 법칙이다. 열역학의 기초부터 시작해 보자. 열은 왜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만 흐르는가? 주머니 속에 빨간 공이 1000개 들어 있고 하얀 공이 1개 들어있다, 눈을 감고 주머니 속에서 공을 하나 꺼내면 거의 예외 없이 빨간 공일 수 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빨간 공이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가 하얀 공이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보다 많다고 얘기한다. 열이란 분자나 원자들과 같은 입자들이 움직이는 분주함의 척도이다. 즉 입자들이 빨리, 세게 움직이면 뜨거운 것이고 천천히, 약하게 움직이면 차가운 것이다.
열이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만 흐르는 이유도 차가워진 상태의 입자들이 가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뜨거운 입자들이 가질 수 있는 경우의 수 보다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언듯 생각하면 뜨거운 것들이 더 활발하게 움직여 입자들이 차지하는 경우의 수가 더 많을 듯 하지만 실제로 뜨거운 경우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원래 무한히 많은 차가운 상태에서 에너지가 소모 되어야 하며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들에 해당된다. 우주의 평균 온도는 영하 270도 정도로 알려져 있다. 즉 절대 온도 0도에 가깝게 얼어 붙어있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거의 대부분의 경우이고 뜨거워지는 경우는 극히 한정된 상태가 된다. 태양과 같이 뜨거운 것은 우주의 지극히 작은 한 점에 해당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된다.
Credit: 숀 캐럴, 현대물리학
위 그림은 입자 2000개를 벽을 가운데 두고 양 편으로 나누어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 입자들이 서로 이동하도록 한 것이다. 처음에는 1500개에 500개로 나뉘어 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맨 위의 그림과 같이 양편에 거의 동등한 1000개, 1000개로 나뉘는 평형 상태에 도달한다. 왜 이렇게 될까?
아래 그림에 그 답이 적혀있다. 한 개 한 개 구분이 가능한 입자 2000개의 상자 속에서 입자 하나하나를 구분해서 나누어 놓을 때 왼편에 2000개 오른편에 0개 혹은 그 반대로 오른편에 0개 왼편에 2000개를 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W)는 각각 1개가 있다. 각각의 입자에 번호를 매겨 구분해서 모든 입자를 한번씩 바꿔가며 1999개와 1개로 나누어 놓는 방법은 모두 2000가지에 이르게 된다. 1998개와 2개로 나누는 경우는 2000x1999/2 가지가 되며 이 경우를 계속 넓혀 생각하면 양쪽에 1000개, 1000개 동일한 갯수로 나누어 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려 2x10600개에 달한다. 그렇기에 대충 어떻게 놓아두어도 2x10600개의 한가지 경우로 가기에 자연은 허용된 경우의 수가 가장 큰 곳으로 수렴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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